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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왜 살아야 할까? 삶의 의미란 정말 존재할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프랭클 책 리뷰

by 박애주의자12 202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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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정말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정말 이유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라 삶에 의미는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pixabay_flo222

저는 삶의 의미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알고만 있습니다. 열심히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의 의미가 없이 그냥 내던져졌다면 죽지 않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회의감이 가득 들더라고요. 저는 용감해지려면 한참 멀었음을 오늘도 다시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삶의 의미를 다룬 베스트셀러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들고 왔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생사의 엇갈림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의 승리를 보여준 프랭클 박사의 자서전적인 체험 수기이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프랭클 박사는 자신의 독특한 정신분석 방법인 로고테라피를 이룩한다.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확고한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 프랭클 박사가 스스로 창안한 현대 실존 분석과 로고테라피의 목적이자 추구하는 바다. 그는 이 책에서 로고테라피의 발견으로 이끌어간 체험을 설명하고 있다. 잔인한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기나긴 죄수 생활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뚱이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부모, 형제, 아내가 강제수용소에서 모두 죽고, 모든 소유물을 빼앗기고 모든 가치를 파멸당한 채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 그리고 핍박 속에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견뎌냈으며,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발견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로고테라피의 실존 분석을 충분한 사례를 들어 다루고 있다. 프랭클 박사는 3단계로 나누어 의식적이며 책임을 지는 인간의 두 현상을 양심적인 현상으로 묶어 실존 분석의 기본적 현상으로 삼고 있다. 이로써 무의식적 심령 현상으로 파고들었고, 정신요법의 실존 분석을 확대 및 인간에게 의식적인 면과 동시에 무의식적인 책임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심령적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적 종교관을 들추어내어 초월적인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저자
빅터 프랭클
출판
청아출판사
출판일
2020.05.30

 

 

 

 

1.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절대자는 스스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pixabay_FelixMittermeier

 

물론 저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종교적 관점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삶의 의미라는 답이 확실하게 있었으면 하길 바라지 않나요? 하지만 사실 우리 솔직해져 보자구요... 사실 없다는 걸 알잖아요. 살아야 할 삶의 의미도 죽어야 할 죽음의 의미도 크게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요? 저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늘 인정하기는 어려운 단계에 걸쳐져 있습니다. 늘 생각을 안해야지 하면서도 자꾸 이 생각에 빨려 들어가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저는 종교가 없지만 가끔 삶의 의미 때문에 종교를 가진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어요. 친구가 말해준 걸 왜곡 없이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신이 부여한 생명에 삶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 자체가 경솔한 생각'이라고 했거든요. 적어도 본인의 삶의 의미가 '있다'라는 선택지를 잡고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삶의 대하는 태도를 바꿔주지 않을까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 中

 

삶이 무의미한 것도 맞지만, 그런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의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나를 괴롭히는 과정도 결국은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어요. 어차피 삶을 중단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저의 입장에서는 이럴 바엔 마음이라도 편해져야지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절대자가 아니고 세상에 던져진 생명체이며, 그저 살다 가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책에서 말하는 방향과는 조금 다르지만 저는 오히려 이게 더 저를 편안하게 만들어 줬습니다. 제 삶에 책임감을 갖는다는 건 저에게는 스스로의 삶의 주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본인을 괴롭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2. 우리는 어쩌면 가성비에 미쳐서 사람마저 가성비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pixabay_PublicDomainPictures

 

여러분은 과거로부터 자괴감을 느낀 적은 없나요? 뭐랄까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게으르다는 죄책감 같달까요? 한국 사회는 유독 더 심하게 부지런할 것을, 성공할 것을,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달성할 것을 강조하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나온 시간과 오늘날의 내가 이룬 결과를 양쪽의 저울에 올려놓고 늘 우리의 삶의 무게를 재는 것 같아요. "너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 하고 말이죠. 사실 우리가 저울에 올려야 하는 것은 결과뿐이 아닌 과정도 있는데 말이죠. 우리는 가성비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스스로의 삶에도 가격표를 달고 저울질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유사한 예로 영화를 들어 보자. 영화는 수천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장면마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최종적인 의미는 각각의 개별적인 상황이 갖고 있는 잠재적인 의미가 각 개인의 지식과 믿음에 최선의 상태로 실현됐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빅터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비극 속에서의 낙관 中

 

영화처럼 보고나서야 그 대사의 의미를 그 눈빛 속의 감정을 아는 경우가 많은 걸 알면서 왜 우리는 삶의 가치를 지금 당장 끊어진 시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걸까요? 절대적인 삶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스스로가 의미를 부여하는 삶이 내 삶을 더 건강하게 바꿔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왜 실천하기가 이렇게 어려울까요. 빠르게 해결한다고 해서 삶을 완성했다는 성취감이 찾아올 리가 없는데 말이죠. 조금 느려도 내 삶의 과정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살아가야 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사람에게 쓸모 있다는 가치를 재는 일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면서도 자꾸 강박적으로 그 저울에 올라가는 저를 보면서 제가 처음으로 짠하고 안쓰러웠어요. 여러분도 자꾸 여러분의 가치의 무게를 결과의 무게만으로 비교하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과정도 같이 저울 위에 올려보는 건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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